아리랑의 뜻과 유래

춘사 나운규와 영화 아리랑 포스터
춘사 나운규와 영화 ‘아리랑’ 포스터

아리랑은 춘사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 이후 널리 유행되었다.

우리나라 가요 중에서 아리랑은 남녀노소 막론하고 가장 많이 부르는 노래 중에 하나이다. 밀양아리랑, 영남아리랑, 정선아리랑 등과 같이 자기 고장의 특색과 향수를 살린 가사를 만들어 부르는 우리나라 대표 민요라고 할 수 있다.

민요 아리랑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유행하게 된 것은 일제시대 나운규가 ‘아리랑’이라는 영화를 제작한 이후이다. 일본인의 탄압을 견디다 못해 나라를 등지고 북만주, 시베리아 등으로 떠나는 참상을 다룬 영화는 깊은 감명을 주었고, 주제가와 함께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아리랑이란 말은 그 뜻이 알쏭달쏭하면서도 마음에 스며들어 친근감을 준다. 그리고 아리랑 특유의 가락은 슬플 때는 슬픈 대로 아픔과 절망을 달랠 수 있고, 즐거울 때는 즐거운 대로 아리랑을 불러 행복감을 만끽하게 해준다. 그래서인지 아리랑은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교포들에게 더욱 사랑 받는 노래이다. 아리랑은 어디에서 유래된 말일까?

밀양아리랑에 얽힌 전설

영남 밀양에 아리랑을 연상시키는 전설이 있다. 아랑(‘알영’이라고도 함)이라는 아름다운 아가씨가 정조를 겁탈당하고 죽음을 당하여 원귀가 되었다. 원귀는 부임하는 수령에게 호소하여 복수했다는 전설인데 그 사당까지 세워져 있다. 억울하게 죽은 아랑을 기리기 위해 주민들이 “아랑 아랑”하고 부른 데서 아리랑이 유래되었다는 이야기다.

밀양아리랑의 전설과 비슷한 내용의 이야기는 밀양의 영남루 뿐 아니라 전국 각처에 전해져 오고 있는데, 이런 연유로 아리랑이란 말이 널리 퍼졌고, 아리랑이란 말이 여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말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리랑이란 말은 영화 주제가에서 나온 것도 아니고, 영남루에서 죽은 아리따운 여인의 이름도 아니다. 아리랑이란 말은 조선시대보다 훨씬 이전인 상고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아리랑임에도 아리랑의 뜻이 무엇인지 아리랑이란 낱말의 어원이 어떻게 되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개 그럴듯한 추론 내지 근거가 부족한 설명뿐이다. 이런 문제를 그냥 넘기면 덕구일보가 아니다. 그래서 합리적으로 판단되는 자료들을 모아봤다.

농경문화에서 큰 하천을 뜻하는 ‘아리라’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지금은 큰 하천을 강(江)이라고 하지만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의 건국초기에서는 ‘아리라’라 불렀고, 그 이전인 고조선시대에도 그렇게 불렀다는 고증이 있다.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好太王)의 비에 아리수(阿利水)라는 문구가 있다. 아리수에 대해서는 현재의 압록강이라는 주장과 한강이라는 주장 그리고 흑룡강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강을 뜻한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다. (‘아리수’에 대해서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다뤄볼까 하는데 아무래도 서울시가 수돗물을 브랜드화 하면서 실수한 느낌이 든다.)

고구려의 경우 초기 통치제도를 5부로 나누는데 반드시 강을 중심으로 제정하였다. 순라(동부), 불라(남부), 연라(서부), 절라(북부), 가안라(중부) 등인데, 여기서 <라(那)>자를 쓴 것은 강을 중심한 것이며, 그것은 강을 중심으로 백성들이 도성을 이루고 삶을 누렸다는 것을 뜻한다. 신라와 백제 역시 강을 의지하여 도성을 이루고 있었고, 초기엔 ‘라’자를 붙여 불렀지만 거의 ‘강자로 변하고 말았다.

농경시대 물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농경문화의 핵심은 강이고, 강의 어원이 ‘아리라’라는 것이다. 신라 박혁거세의 왕후 알영은 알영정이라는 우물을 상징하여 이름을 알영이라 했다고 한다. 알영이란 끊임없이 샘솟는 물을 뜻하는 것으로 아리라와 같은 뜻이다.

농경문화에서 가뭄이 들거나 홍수에 강이 범람을 하는 등 강과 관련된 애환이 없을 수 없다. 강을 뜻하는 아리라가 아리랑으로 변하여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는 설에 수긍이 간다.

조선말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공사에서 나온 ‘아이롱(我耳聾)’에서 유래되었다는 설

흥선대원군은 국위를 선양하기 위하여 임란 때 불탄 경복궁의 중건을 계획하고 고종 2년(1865)에 공사를 시작하였으나 당시의 국가 재정은 극히 빈약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원군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백 배에 해당하는 당백전(當百錢)을 발행하기도 하였고, 전국의 부호를 조사하여 이들에게 강제적으로 헌금을 징수하였다. 헌금을 낼 수 없는 백성들은 강제로 부역에 동원되었는데, 이로 인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아는 내용이다.

그러자 이런 혼탁한 세상에서 “차라리 내 귀가 먹어서 아무 것도 듣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아이롱(我耳聾)’이란 말이 식자들 사이에서 유행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말이 당시 부역에 동원되었던 백성들의 처량한 신세와 맞아 떨어져 ‘아이롱’이란 말이 널리 불려지게 되었고 뒤에 아리랑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아리랑을 ‘아이랑(我離娘)’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노동에 시달린 백성들은 오랜 고독으로 인하여 고향에 두고 온 처자를 몹시 그리워하게 되었는데 “처(妻)와 떨어져 살기 힘든 자신”들의 심정을 ‘아이랑’으로 표현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아리랑으로 변하여 불려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경복궁에 동원된 백성들이 가정을 ‘떠나 있기가 어렵다’는 뜻의 ‘아난리(我難離)’가 “아라리가 났네”의 ‘아라리’로 변하여 전승되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말부터 아리랑이 불려졌을 것이라는 주장은 잘못일 가능성이 크다. 말이 변하는데는 일정기간 시간이 필요한 법인데, 일제 때 만들어진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을 염두에 둔다면 그 기간이 너무 짧다.

마무리… 아리랑은 아라리가 낳았다?

아리라가 강이란 뜻이면 아무래도 농경문화에서 아리랑이 유래되었다는 것이 정설일 가능성이 많다. 아리랑은 아라리가 낳았다는 우스개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이유다.

아리랑의 가사를 살펴보면 아라리는 아리랑 뿐만 아니라 쓰리랑까지 낳았다고 나온다. 응응해서 낳았다고 구체적으로 방법까지 나오는데 그냥 무시해버려야 할까? 난제다.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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