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만에 다시 읽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히가시노 게이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일본여행 안 가고 일본제품 안 쓰는 것으로 마치 독립투사라도 된 양 뿌듯해하고, 유니클로 앞에는 매장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매국노라며 피켓을 들고 감시하는 사람도 있다. 일부 서점에서는 일본 서적코너를 아예 ‘왜구소설’이라 분류해 놓은 곳도 있으니 그야말로 실소가 나온다.

이 와중에 2012년 출간 이래 만 7년째 대형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 당당히 올려져 있는 왜구소설이 있으니 바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반일 감정의 여파가 그나마 소설까지는 미치지 않은 모양이다.

국내 누적 판매량이 120만 부가 넘는다니 대체 이 책의 무엇이 오늘을 사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애국자들(?)을 매국(?)하게 만드는지 새삼 궁금해져 7년 전 읽었던 책을 다시 읽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일본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가 썼다. 그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현대 작가이다. 추리소설로 유명하고 발표했던 작품들 대부분이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두꺼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는데, 그럼에도 내가 읽은 이 작가의 작품은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전부이다.

이 작품이 일본에서 월간지 연재를 거쳐 단행본으로 출간된 것이 2012년 3월이었고,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같은 해 12월이었다.

처음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되어있던 이 책의 뒤표지에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기묘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가슴 훈훈한 이야기’라고 적혀 있던 소개 문구에 이끌려 선뜻 골랐던 기억이 난다. 옮긴 이의 말을 보니 마치 나의 책 고르는 안목을 칭찬해 주는 것 같다.

ㅡ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대표작으로 손꼽힐 신작이 나왔다. 인간 내면에 잠재한 선의에 대한 믿음이 있고, 모든 세대를 뭉클한 감동에 빠뜨리는 기적에 대한 완벽한 구성이 있다. 누구에게나 추천할 수 있는 대중적이면서도 깊이를 잃지 않는 명작을 드디어 써냈다는 느낌이다 ㅡ

450여 쪽의 볼륨 있는 분량이지만 책장은 쉽게 넘어갔고, 옮긴 이가 소개한 대로 가슴이 훈훈해지는 내용이었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는 작가의 필치가 마음에 들어 당시 고1이던 딸아이에게도 권했었다. 딸에게도 온기가 전해졌던지 주변 친구들에게도 더러 읽기를 권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우리 모녀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나름 일조를 한 것 같다.

7년이 지난 지금, 나는 50대가 되었고 딸아이는 대학 졸업반이다. 다시 읽어도 역시나 가슴이 훈훈해지는 내용이라 겨울날 읽기에 적합한 소설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나 또한 평범한 애국자(?)라서인지 작은 꼬투리라도 잡고 싶어진다.

‘이건 기적이라기보다는 요행 아냐?’

이야기는 세 명의 좀도둑이 지금은 폐가가 된 나미야 잡화점에 숨어들면서 시작된다. 같은 고아원 출신 친구인 쇼타, 아쓰야, 고헤이는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은 모두 백수 신세. 급기야 도둑질까지 하게 된 밑바닥 인생들이 이 집에 들어온 탓에 남의 고민을 상담하는 거창한 과제를 떠안게 되는데. 믿기 어렵지만, 이 가게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불가사의한 공간이다.

“인기폭발! 나야미(고민)를 척척 해결해주는 잡화점”

40여 년 전 나미야 잡화점은 잡화점 본연의 업무보다 오히려 고민 상담소로 더 유명한 곳이었다. 나미야라는 이름을 가진 잡화점 주인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장난기 어린 편지 한 장에도 진심을 담아 성의 있는 답변을 내놓는다. 그러는 사이 고민편지의 내용이 점차 진지한 것들로 바뀌게 되는데 그것은 나미야 씨의 인생 경험에서 얻은 혜안과 따뜻한 마음씨가 제대로 전해진 결과였다.

그런데 우연하게도 2012년 현재를 살아가는 세 명의 좀도둑이 자신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나미야 잡화점 앞으로 온 고민편지의 상담역할을 떠안게 된다.

셋의 나이를 다 합해봐야 나미야 할아버지만큼도 안 될 것 같은데, 작가는 아직 경험도 연륜도 일천한 이런 말도 안 되는 젊은이들을 상담역으로 기용해 나미야 씨와는 다른 신선한 고민 해결방법을 찾고 싶었나 보다.

역시나 나미야 씨와 달리 이들의 냉소적이고도 솔직한 제멋대로의 상담은 고민편지를 보낸 이로 하여금 오히려 자신의 인생을 정말이지 진지하게 돌아보도록 하는 계기가 된다.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보낸 다섯 가지 사연이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어진 이 소설은 각각의 주인공은 물론 과거의 상담자 나미야 씨와 현재의 상담자인 세 명의 좀도둑까지 모두가 ‘환광원’이라는 고아원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세 명의 젊은이가 내놓는 세 개의 고민편지에 대한 답변은 퍼펙트하다. 현재를 사는 그들이기에 과거의 사연에 대해 어떤 결정이 옳은지 이미 정답을 알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기적에 대한 완벽한 구성이라지만 답안지를 유출해 억지로 만들어낸 기적 같아 이점이 다소 찜찜하다.

반쪽짜리 올림픽이 된 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 출전하지 말 것을 조언하는 것이나, 현재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는 일본 최고 여가수의 히트곡이 된 노래를 만들었지만, 편지를 보낼 당시에는 별 볼 일 없었던 삼류 가수에게 주는 희망의 메시지는 그나마 있을 수 있는 일이니 귀엽게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준 이들에게 은혜를 갚고자 ‘돈을 엄청나게 많이’ 벌고 싶은 열아홉 호스티스에게 일본의 경기 활황과 버블경제, 그리고 도래할 네트워크 시대까지 만점짜리 답안지를 제시하는 설정은 다소 껄끄럽다.

“앞으로 경기가 좋아질 테니 86년부터 부동산 투자와 주식투자를 하되 버블이 시작되는 89년 이전에 모두 손을 떼라, 그다음엔 컴퓨터 네트워크과 휴대폰을 이용한 비즈니스를 해라, 어떻게 설명해도 나를 믿을 수 없을 테니 그저 족집게 점쟁이쯤으로 생각해라”

강한 확신에서 나온 마치 예언 같은 이 말을 그대로 따른 그녀는 결국 중차대한 자신의 인생을 전적으로 족집게 점쟁이에게 맡긴 셈이다. 점쟁이의 복불복 예언을 기적이라 부르기는 왠지 좀 꺼림칙하다.

그에 반해 과거 나미야 씨의 상담 편지에는 따스한 인간미가 묻어난다.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야반도주를 하게 된 처지를 고민하는 청소년에게 “어떤 경우에도 가족은 함께 해야 한다”라며 가족의 소중함을 일깨우는가 하면, 유부남과의 사이에 아이를 갖게 된 예비 미혼모의 고민에 “태어날 아기가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낳아도 좋다”라는 진심 어린 조언.

또 하나! 좀도둑 중 한 명인 아쓰야가 보낸 백지 편지에 대한 나미야 씨의 마지막 편지야말로 이 책이 오래도록 독자들의 사랑을 받게 된 이유가 될 것 같다.

ㅡ이름 없는 분에게.
어렵게 백지 편지를 보내신 이유를 나 나름대로 깊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이건 어지간히 중대한 사안인 게 틀림없다. 어설피 섣부른 답장을 써서는 안 되겠다, 하고 생각한 참입니다.
늙어 망령이 난 머리를 채찍질해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이것은 지도가 없다는 뜻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해봤습니다.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지라면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상담 편지에 답장을 쓰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난문을 보내주신 점, 깊이 감사드립니다.
나미야 잡화점 드림ㅡ

편지를 다 읽은 아쓰야는 이미 자수를 결심한 두 친구와 함께 걸음을 옮긴다. 보이지 않는 세 친구의 새 출발이 미래에 진짜 기적을 불러 내리라 기대해본다.

이 작품의 인기는 세계적이지 않다. 권선징악이나 보은, 죽음을 불사한 헌신적인 자식 사랑 등은 아무래도 서양보다는 동양에서 중시하는 미덕인 듯 유독 한국과 중국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나미야 잡화점은 1979년과 2012년을 잇는다. 그사이 사람들은 컴퓨터와 휴대폰이라는 획기적인 문명의 이기로 SNS라는 새로운 소통의 장을 마련했지만, 가슴 한편에는 손편지가 주는 따뜻한 정서를 못내 그리워하는 것 같다.

과거에는 어디서든 볼 수 있었던 흔하디흔한 잡화점에서 벌어지는 만화 같은 이야기는 독자 누구라도 사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설정이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조언을 받고픈 고민거리 한두 가지 없는 사람이 있을까만 결단은 결국 자신의 몫이다. 나미야 씨의 말처럼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려놓고 그것이 옳은지 확인받고 싶어 상담을 청하는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 끝, 큰길과 맞닿는 곳에서 왼쪽으로 코너를 돌면 ‘순덕이네’가 있었다. 구멍가게라고 하기엔 제법 규모가 있었고 쌀이며 과일, 문구까지 고루 갖춘 그야말로 잡화점이었다. 달리 간판이 내걸린 건 아니라서 주인 할머니의 손녀딸 이름으로 불리는 가게였다.

지금처럼 번듯한 쇼윈도가 있는 가게가 아니었기에 비닐로 성글게 만든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면 여기저기 켜놓은 백열전구가 물건들을 비추고 있었고, 안쪽 깊숙이 진열된 잘 안 팔리는 문구라도 찾을라치면 후레쉬를 동원해야 하는 그런 가게였다.

간혹 엄마 심부름을 가면 할머니는 하얗고 동그란 눈깔사탕 한두 개를 주곤 했다. 가능하면 오래도록 아껴 먹으려고 입안에서 이리저리 조심조심 굴려 가며 사탕을 빨아 먹던 생각이 난다.

아카시아꽃을 따먹고 메뚜기를 잡아먹던 시절에 눈부시게 하얀, 윤기가 좔좔 흐르는 눈깔사탕 한 개가 얼마나 귀한 간식이었던지······.

나미야 잡화점이 베스트셀러가 되는데 일조한 이유는 바로 그 눈깔사탕에 대한 기억을 소환한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미야 잡화점의 모양새를 보니 단박에 ‘순덕이네’가 떠오른다. 도시 정비로 1979년에 그 자리로 도로가 관통하는 바람에 우리 집도 순덕이네도 철거가 되었으니 꼭 나미야 잡화점의 폐업 시기와 같다. 나미야 할아버지 모습에서 순덕 할머니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지만 순덕이네가 아직 남아 있다면 아마 거기서도 나미야 잡화점에서와 같은 따스한 기적이 일어날 것 같다. 그것이 요행이든 진짜 기적이든 많은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덥혀준 이 책이 ‘왜구소설’의 딱지를 뗄 수 있도록 한일관계가 하루빨리 정상화되기를 바라며, 아직 읽지 않은 분들에게는 겨울이 가기 전에 한 번쯤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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