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에 어울리는 소설, 박완서-나목

박완서-나목

서평을 적을 일이 있으면 빼놓지 않는 작품이 있다. 벌써 몇 번이나 적다보니 이제 작품내용을 외우는 경지에 이르렀다. 바로 화가 박수근(1914~1965)을 모델로 한 박완서 작가의 처녀작 ‘나목(裸木)’이다.

내가 소장하고 있는 책은 박완서 작가가 문단에 나온 지 이십년이 되던 해인 1990년 ‘작가정신’에서 출간한 개정판이다. 나목이 작가의 첫 작품이었으니 이십년을 거슬러보면 1970년 세상에 나온 것이 되는데 거의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놀랍다. 괜히 명작이 아니다.


“문단에 나온 지가 올해로 이십년이 된다. 첫 작품이 裸木이었다. 그동안 단행본으로 나왔다가 절판되기도 하고, 전집이나 선집에 수록되기도 했지만 다시 한번 차근차근 읽어보면서 손을 본건 이번이 처음이다. (중략)

이 작품에 대한 나의 애착은 편애에 가깝다. 裸木을 생각할 때마다 괜히 애틋해지곤 한다. 가끔 여지껏 쓴 작품 중에서 어떤 것을 가장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망설이지 않고 裸木이라고 대답해온 것도 그런 무조건적인 애틋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략)

자신의 이십년전 처녀작을 읽으면서 절절한 애틋함에 눈시울을 적시는 늙은 작가-이건 아무리 좋게 봐주려도 궁상과 비참의 극치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이하 생략)”

『1990년 4월, 박완서 (‘작가의 말’ 중에서)』


나목은 6·25전쟁 시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서울 미군 기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이경이라는 처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수작(秀作)이다.

난리 중에 오빠들이 폭격으로 사망하고 그 충격으로 어머니마저 정신을 놓아버리자 이경은 정신적인 외톨이가 되어 혼란을 겪는다. 그 와중에 자신이 근무하는 미군기지 PX내 초상화부에 옥희도라는 화가가 환쟁이로 들어오면서 이경에게 미묘한 변화가 생겨난다.

환쟁이라는 말은 초상화부에서 미군들의 주문에 맞춰 스카프나 손수건에 그림을 그려주는 화가들을 이경이 악의 없이 호칭하는 말이다. 초상화부 사장 최만길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하면서 항상 ‘불우한 예술가’라고 하지만 그것은 환쟁이들이 돈을 벌어주기 때문이란 것을 이경은 알고 있다.

새로 들어온 옥희도는 초상화부의 다른 환쟁이들과는 달리 일제 때 몇 번 선전에서 입선을 했었던 그림밖에 모르는 천생 화가이다. PX에서 전기공으로 일하는 태수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이경은 옥희도를 남다르게 생각하고, 우연히 보게 된 옥희도의 그림에서 그의 절망을 읽어내고 마음아파 한다.

“무채색의 불투명한 부우연 화면에 꽃도 잎도 열매도 없는 참담한 모습의 고목이 서 있었다··· 화면 전체가 흑백의 농담으로 마치 모자이크처럼 오틀도톨한 질감을 주는 게 이체로울 뿐 하늘도 땅도 없는 부우연 혼돈 속에 고목이 부유하고 있었다. 한발에 고사한 나무··· 짙은 안개 속의 한발··· 무채색의 오톨도톨한 화면이 마치 짙은 안개 같았다”

주인공 이경에 대한 박완서 작가의 심리묘사가 워낙 뛰어나 나목이 혹시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작가와 이경이 살아온 주변환경이 너무 흡사하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다.

마리아, 당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기나 하리까
마리아, 당신만은 아시리라···
마리아, 당신이 아니고서야 누가 알기나 하오리까
마리아, 당신만은 아시리다···

이경이 끝내 연결하지 못했던 시의 뒷 부분을 “그리움이란 참으로 쓰라린 것임을”로 이어놓고, 아직 읽지 않았다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읽어보시라 권한다.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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