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네가 오후 네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네가 오는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나는 더욱 행복해지겠지.”

제목 때문일까? 어린왕자에게 하던 여우의 말이 떠오른다. 기다림이란 바로 그런 것이리라, 설렘과 희망을 넘어 행복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일. 사람의 일생에서 기다림에 할애하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다. 아니 어쩌면 삶의 대부분이 기다림일지도 모르겠다. 기다림은 종종 지루함이나 짜증을 동반하지만 그럼에도 언제 어디서나 반복되는 인간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임에 틀림없다.

각종 책들이 주인을 기다리는 서점의 진열대를 돌아보다가 <고도를 기다리며>에 붙박인 듯 시선이 고정되었다. 표지에 실린 저자의 강렬한 눈빛 때문일 수도 있고, 꽤 오래전에 보았던 이 작품의 연극 무대가 떠올랐기 때문일 수도 있다.

희곡 읽기가 생각 외로 참 지루한 일이라는 것은 읽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소설이야 쓰여있는 대로 읽으면 그만이지만 희곡은 지문에 따라 생각해 가며 읽어야 하기 때문에 재미가 반감될뿐더러 속도 또한 더디게 마련이다. 그러니 특별한 이유가 있거나 큰맘 먹지 않고서는 바쁜 세상 성질 급한 사람들이 굳이 희곡을 읽는 일은 드문 것 같다.

시청률이 아무리 높은 드라마라도 대본이 출판되지는 않는다. 천만 관객이 든 영화의 시나리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원작이 소설이라면 드라마나 영화의 성공 여부에 따라 책도 더 많이 팔리게 마련이다. 이번에 서점에 갔을 때 눈에 띄는 자리에 <82년생 김지영>이 놓여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연극 무대가 성공했다 한들 원작 희곡을 찾아 읽는 사람이 몇이나 되려나.

<고도를 기다리며>의 저자 사무엘 베케트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주로 생활했다. 이 작품으로 1969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고, 영국 연극계에서는 이 작품을 ‘20세기 최고의 희곡’이라 극찬 한 바 있다. 그뿐인가 뉴욕타임스는 꼭 읽어야 할 추천도서 백 편의 목록에 이 작품을 포함시켰으며 미국 대학위원회가 선정한 SAT 추천 도서이기도 하다. 이 정도면 시간을 투자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희곡이 아닐까?

작품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특별한 내용도 기승전결도 없어 보인다. 페이지를 더할수록 고도가 누구인가에 대한 의문만이 팽배할 뿐 그는 정작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어쩌면 사람이 아니기에 등장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2막으로 나누어진 이 작품의 배경은 1막과 2막이 동일하다. 1막의 시작은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저녁’, 2막은 ‘다음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

달랑 나무 한 그루 서 있는 시골길에서 에스트라공 (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라는 노쇠한 두 부랑자가 시답잖은 대화와 삐에로 같은 행동으로, 지루해 죽겠다는 듯 억지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낑낑대며 구두를 벗기 위해 애쓰는 고고는 힘이 빠지면 잠시 포기했다가 다시 구두 벗기를 반복한다. 그런가 하면 디디는 모자를 벗어 속을 들여다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흔들어보고 다시 쓰기를 반복한다.

같은 말을 몇 번씩이나 되풀이하지만 서로 간의 대화는 단절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같은 말과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때론 티격 대고 때론 다독이며 서로 의지하면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린다.

그가 누구인지 또 언제 오는지 확실치 않지만 그들의 막연한 기다림은 50년 이상, 거의 일평생 계속되고 있다. 정말 약속을 하기는 한 건지, 시간과 장소는 맞는지 그 무엇도 분명한 건 없다. 그럼에도 고도를 기다리는 일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라며 목을 맬 생각을 할 만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들의 지루한 삶을 이어가게 하는 유일한 생존 이유이다.

시간이 얼마쯤 지났을까, 두 사람의 새로운 인물이 등장한다. 채찍을 휘두르며 자신의 노예를 마치 짐승처럼 다루는 포조라는 이름의 주인과, 고삐에 묶인 채 그야말로 짐승에 다름 아닌 모습으로 양손에 든 무거운 짐을 질질 끌며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럭키라는 이름의 노예. 얼핏 둘은 철저한 주종 관계처럼 보이지만 상대가 있음으로 해서 비로소 존재가치가 있는 공생관계 같기도 하다.

2막에서 포조는 장님, 그리고 럭키는 벙어리가 되어 다시 등장하는데 이는 둘의 관계가 더욱 절실해졌음을 나타내는 설정이 아닌가 싶다. 포조와 럭키를 통해 작가는 디디나 고고와는 또 다른 인간 삶의 단면을 보여주려 한 것 같다. 어쩌면 둘 중 하나가 고도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고도가 선인지 악인지, 희망인지 절망인지 책속 어디에도 제시되어 있지 않으니 그 또한 가능한 가정이 아닐지.

디디와 고고는 물론 포조와 럭키 또한 보통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과 행동들을 한다. 당연 서로 간에 의사소통이 될 리 없다. 그저 각자의 이야기를 할 뿐이다. 소통의 부재, 고독한 현대인, 막연한 기다림·······, 작가가 말하려는 것은 그런 건가 보다. 네 사람 중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그 불완전함을 채워주는 서로가, 서로의 고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친다.

포조와 럭키가 퇴장하고 다시 둘만 남게 된 고고와 디디. 두 사람의 지루한 기다림 끝에 한 소년이 등장한다.

“고도 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

그들은 소년이 그 말을 할 줄 이미 알고 있다. 왜냐하면 소년이 온 게 오늘이 처음은 아니니까. 그러나 “오늘 처음 왔다”는 소년의 말은 이들 기다림의 불확실성의 무게를 더할 뿐이다.

“고도 씨에게 가서 뭐라고 전할까요?”
“가서, 가서 그냥 우리를 만났다고만 하려무나.”

자신들이 기다리고 있음을 고도 씨가 알아주기만이라도 했으면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두 사람은 그렇게 또 부여잡는다. 소년이 퇴장하면 순식간에 밤이 된다.

에스트라공 : 그럼 갈까?
블라디미르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이렇게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면 다음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두 사람의 기다림은 다시 이어진다. 나무에 잎이 조금 달렸을 뿐 달라진 건 없다. 그러나 이 설정만으로도 시간이 상당히 경과되었음을 짐작할 수는 있다.

고고와 디디의 반복되는 말과 행동, 포조와 럭키의 등장, 1막과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다 마찬가지로 마지막에 등장한 소년은 어제와 똑같은 고도의 전언을 전한다. 둘은 ‘만일 내일도 고도가 오지 않으면 튼튼한 끈을 가져와 목이나 매자’고 결의 하지만 1막에서처럼 역시나 움직이지는 않는다.

블라디미르 : 그럼 갈까?
에스트라공 : 가자.
둘은 그러나 움직이지 않는다.
ㅡ끝ㅡ

이렇게 1막과 같은 2막이 끝나면 작품도 끝나지만 만일 3막이 있다면 역시나 같은 상황이 반복되리라는 것은 독자 누구라도 가능한 예측이다. 3막, 4막, 5막······· 언제까지나 계속될 그들의 기다림이 눈에 선하다.

책을 덮고도 한동안 고도가 과연 누구인지, 무엇인지, 실체가 있기는 한 건지 끊임없는 의문이 머릿속을 떠돈다. 공연을 전제로 쓰인 희곡이기에 책보다는 연극 무대에서 이 작품을 만나는 것이 한결 이해가 빠를 것 같다.

작품의 내용과 형식이 매우 새로워 관객들은 충격 속에서 그 의미를 파악하려고 애썼으며 신문과 방송은 작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그 해답을 찾으려고 했지만 허사였다.
미국에서의 초연 때 연출자 알랭 슈나이더가 고도가 누구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고 묻자 베케트는 ‘내가 그걸 알았더라면 작품 속에 썼을 것’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작가 자신이 그와 같은 대답을 한 이상 관객들 사이에 물음은 끊이지 않았고, 그 해답 역시 물음만큼이나 무수히 쏟아져 나왔다. 고도는 신이다, 자유다, 빵이다, 희망이다·······.
고도(Godot)가 영어의 <God>과 프랑스어의 <Dieu>를 하나로 압축한 합성어의 약자라는 해석도 있다. 어쨌건 고도에 대한 정의는 구원을 갈망하는 관객 각자에게 맡겨진 셈이다. <민음사 작품해설 발췌>

저자 사무엘 베케트는 2차대전 중 프랑스에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했고, 그로 인해 나치를 피해 남프랑스의 허름한 농가에서 피신 생활을 했던 경험을 토대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숨어 지내며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자신의 상황을 일정 부분 작품 속에 반영한 것이라면 고도를 기다리는 것은 단순한 기다림이 아닌,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베케트에게 있어 기다림이란 공연한 것이 아니라 본능적인 삶의 방식이다. <뉴욕타임즈>

그렇다. 이 작품에서 기다림은 삶의 방식이다. 고고와 디디 두 주인공은 살기 위해서 끊임없이 기다림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결코 공연한 것이 아닌 절실함으로.

기다림이 없는 삶이 얼마나 외롭고 의미 없을지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잘 알고 있나 보다. 그러기에 가슴속에 저마다의 고도를 품고 그것을 기다리며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기다림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그리고 나 역시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네시에 올 너로 인해 세시부터 행복해질’ 어린왕자 속 여우처럼 현명해져야겠다.

오늘도 나는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기다렸을까? 당장은 눈이 좀 내렸으면 좋겠다. 탐스럽고 포근한 함박눈이 내리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것 같다. 은연중에 오지 않는 전화 그리고 오지 않을 사람도 기다린다.

조금 멀게는 마른 나무에서 새순이 돋아나기를, 그리곤 이내 꽃이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작품 속 두 주인공처럼 반복되는 일상과 함께 속절없이 흐르는 나의 시간 속에도 늘 고도가 있기에 오늘도 그저 담담하게, 아니 행복한 맘으로 기다려보련다.

아, 이 작품이 조만간 무대에 오르기를 기다려 보는 것도 독서의 여운을 더하는 일이겠다.

[저자의 다른 서평]
‘다시 오지 않는 것들’ 그리고 최영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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