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을 품고 있을 것 같았던 충주호 그리고 부처님의 미소

부처님의 미소

그날 후배를 만나러 충북 제천으로 향하였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일이 좀처럼 없는 내가 고시공부하기 좋은 절이 있으니 그곳에서 공부하면 어떠냐는 후배의 제안에 넘어가 나선 길이었다. 절구경도하고 충주호에서 배도 태워준다는 후배의 꼬드김도 한몫을 한 것이 사실이다.

대전에서 버스를 타고 네 시간정도를 지루하리만큼 달린 후에야 제천에 도착하였다. 제천은 초행인데 그런 이유에서인지 후배가 버스정거장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근 향어 양식장에서 향어 세 마리를 사들고 후배의 집으로 갔다. 그날 저녁 우리 둘은 향어 회와 술 몇 잔을 먹고 마시며 잘 알지도 못하는 인생 이야기를 나누다 늦게 잠이 들었다.

다음날 후배와 나는 아침을 먹고 충주호 건너편에 있다는 산속의 절로 가기위하여 집을 나섰다. 난생 두 번째로 배라는 놈을 타고 충주호를 건너는데 기분이 째지게 좋았다. 내가 가는 이 절은 한번 공부하러 들어가면 나오기 힘들어서 7개월에서 8개월은 있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행정고시를 준비하는 중이라 조용한 절에서 공부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주호를 가로지르는 뱃전에서 연신 담배를 물고 호수를 쳐다보니 충주호가 얼마나 큰지 새삼 놀라웠다. 넓고 깊은 호수가 거대한 용을 품고 있는 것 같아 괜히 겁이 났지만 탁 트인 광경 때문인지 속은 후련했다.

충주호를 가로지른 배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들어가서 보니 산들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다. 어느 산자락에 내려서 후배에게 “이놈의 절에 들어가면 나 스님 되는 거 아니냐?” 하니, “형님은 스님이 되어도 괜찮아. 잘 어울려!”한다. 이 말에 눈앞이 깜깜해져오는 것은 나에게 세간의 인연과 정이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산자락에서 산을 오르다보니 너무 외진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번씩은 온다는 후배의 말에 대학 2학년 때 가본 천둥산이 생각났다. 천둥산은 내가 아는 가장 오지에 있는 산이다.

대략 한 사십분가량 계곡을 따라 오르니 절벽을 깍듯이 하여 조그마한 절이 하나 있다. 마침 오후 식사시간이 되었는지 스님은 우리를 보자마자 “젊은이 점심식사 같이하지” 한다. 시장하기도 하고 스님과 이야기도 나눌 겸 “예, 그러지요. 스님.”하고 대답했다.

그래서 스님과 나와 후배 그리고 어떤 젊은이 이렇게 네 명이서 점심을 먹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같이 식사를 한 스님은 허연 머리털로 보아 못되어도 70은 넘은 노스님임이 분명한데 젊은이의 나이는 가늠이 안 된다. 뒤에 54살이라는 것을 알고 많이 놀랐다.

식사가 끝나고 젊은이가 밥상을 들고 나간 후에 스님은 절 구경을 시켜주신다고 하였다. 바로 절 앞이 충주호인데 비가 내리면 운무가 가득하여 산봉우리만 보이는 모습이 장관이라며 이경치가 백두산에서 밑을 보는 것과 똑같다는 거였다. 백두산에 가본 적이 없으나 절경 중에 절경인 것이 그 말이 사실처럼 들렸다.

이 절터는 의상대사가 1500년 전에 닦아놓은 것이고, 조계종 노스님들이 1년에 한 번씩 자리이동을 한다는 것이었다. 스님과 동행하면서 절터를 둘러보다가 의상대사님이 저 절벽과 산봉우리를 쳐다보고 앉아서 절경을 감상하시다가 가셨겠구나 생각을 하는데 새삼 주위 풍경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다. 그리고 비가 오면 절경이 더욱 살아난다는 스님의 이야기에 나는 ‘운이 좋은 모양’이라며 속으로 좋아라했다.

무심코 눈을 바닥으로 내리니 바닥에 구멍이 나있다. 처마에서 떨어진 낙수에 패인 자국인데 그 구멍의 크기에서 나는 절의 나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낙수 떨어지는 소리와 비 소리에 어울려 나는 얼핏 무념의 상태에 빠져 들어갔다.

한 몇 분을 그렇게 있다가 정신을 차리니 노스님이 앉아서 나를 보고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이었다. 스님의 미소가 부처님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스님이 부처님이었다는 것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 그 후에 한 번도 다시 가보지 못했지만, 지금도 가끔 꿈에서 그 절벽을 향해 앉아서 그때 그 빗소리와 낙수 떨어지는 소리를 듣곤 한다. 지금 그 무념의 순간을 간직하고 스님의 잔잔한 미소에 합장을 하여 본다.

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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