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선임관과 어머니의 된장국

어머니

어머니 하면 누구나 한가지씩은 떠올려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아버지라는 단어보다 어머니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남다르다. 아버지야 씨 뿌리면 그만이지만, 어머니는 뱃속에서 10개월을 품어 주었으니 어머니에 대한 느낌이 남다른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여자들은 모르겠지만, 남자에게 군대란 어머니의 특별함을 유난히 강조하는 곳으로 기억되어 있다. 나는 대학 2학년 마치고 군에 입대하였다. 애인이야 있었지만 애인에게 남자의 눈물을 보일 수는 없고, 그저 어머니와 아버지의 배웅을 받으며 훈련소로 입대하였다.

이놈의 군대란 곳에 들어와 보니 틈만 나면 ‘어버이 은혜’를 부르라는 것이다. 어버이 은혜를 부르다보면 목석같았던 마음이 약해져 어느새 눈가에 물기가 돈다. 힘든 훈련이 끝나고 부르는 어버이 은혜는 신병인 우리를 꽤나 울렸다.

어머니의 가슴에는 짚에 매달린 계란처럼 자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있다. 내 아내도 아이가 생기고 나서부터는 온통 아이들 생각뿐인지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무조건적으로 나에게 향하던 애정이 아이들이 생기고부터 모두 차단되고 오로지 아이들만 챙기는 것이다.

나는 아이들이란 건강하고 튼튼하게만 자라면 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터라 그저 야생멧돼지처럼 풀어놓고 기르고 싶은데 아내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을 무슨 왕국의 왕자님처럼 키우는데 그러다보니 서로가 신경이 예민해져서 자주 다투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랬다. 나의 잘못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는 내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는 내가 하고자하는 일은 무조건 오케이였다. 그런 것만 보더라도 아버지가 바라는 자식상과 어머니가 바라는 자식상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아버지가 현실적이라면 어머니는 현실을 뛰어넘은 무조건적인 헌신이다. 나의 어머니가 그랬고, 나의 아내가 그랬다. 나는 그런 어머니를 좋아했지만, 아버지의 마음도 알 수 있었기에 경외하는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게 어머니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군 신병시절 나는 초소 근무를 하다 백일 만에 작전과로 차출 되었다. 누구나 작전과 근무가 초소에서 근무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 작전과는 휴일이 없다. 업무가 연장되는 경우가 숱하게 많은데 특히 상황이 많이 발생할수록 그런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내가 작전과에 근무하면서 상황대처능력은 키울 수 있었지만 근무할 때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자다가도 상황이 떨어지면 밤낮 구분 없이 짧게는 한 시간, 길게는 여섯 시간동안 상황을 통제해야하는 일이 허다했다. 그렇게 그 어려운 6개월, 즉 일병이 될 때까지 군에서 고통 아닌 고통을 받으며 복무해야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힘든 것은 구타였다.

그 때는 군 폭력 정도는 예사로운 시절이어서 6개월 동안의 작전과 신병 시절 하루가 멀다 하고 두들겨 맞았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작전계통으로 만들어 준다는 군대식 방법이었던 것이다. 어느 너무 힘든 아침에 문득 어머니의 된장국 냄새를 기억해내고는, 어머니의 된장국을 한번이라도 먹고 죽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 달 내내 한 적도 있었다.

어느 날 나는 군 생활이 너무 괴로워 총에 실탄 두발을 장전하고는 나를 괴롭혔던 선임관을 찾아 들어갔다. 그 당시 나는 그 선임관을 죽여야겠다는 생각 외에는 없었다. 문을 차고 들어가 소총을 겨누며 선임관을 찾는데 선임관은 없고 내 밑 졸병이 나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문득 어머니의 된장국과 그 손맛이 떠올랐다.

마음을 진정하고 다시 내무반에 와서 실탄을 해지하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군대생활을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에 허벅지에 피가 나도록 맞고 그 핏물을 닦을 사이도 없이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그때 고참병 하나가 카네이션을 들고 와서 나에게 선임관에게 달아주라는 것이었다. 나는 싫었지만 고참병의 명령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를 6개월 동안 고통으로 내몰았던 그 선임관에게 카네이션을 달아주었는데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그 후 나는 선임관에게 맞아 본 일은 없고, 나머지 군 생활도 한대도 맞지 않고 보낼 수 있었다. 매를 맞으며 보냈던 6개월이 나를 능숙한 작전병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총을 들고 들어갔을 때 어머니의 된장국과 그 손맛이 아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지금도 해본다. 아마 지금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고된 일을 마치고 자리에 앉아 업무일지 양식을 채워놓고 그때의 선임관과 어머니의 된장국 손맛을 느끼고는 쓴웃음을 지워본다.

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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