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글의 조건, 울림과 되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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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과 되울림

율곡(栗谷) 선생은, 좋은 시문을 아울러 〈선명(善鳴)〉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나는 이 〈선명〉이라는 말이 그지없이 좋습니다. 그 어른은, 오늘날 우리가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통틀어 〈선명〉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선명〉이 무엇이겠습니까? 〈좋은 울림〉일 테지요. 〈착한 울림〉으로 새겨져서는 안 됩니다. 착하다고 하는 경우 벌써 여기에는 선악을 재는 시대의 잣대가 개입한 낌새가 느껴지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착한 울림〉이 되어 한 시대의 총애를 받는 글을 우리는 좋은 글이라고는 부르지 않는 것입니다. 무릇 좋은 시문이라는 것은 특정 시대를 통틀어 유효한 〈좋은 울림〉을 지어내는 것, 혹은 온 시대에 두루 〈잘 울린 것〉이어야 하는 거지요.

나는 우리 삶이 타인에게 드러내는 간섭의 의도, 예술이 밖을 향하여 지니고 있는 울림의 의도를 세 단계로 나누어 보고, 지극히 초보적인 변화의 단계를 〈변형(變形)〉, 본격적인 참여의 단계를 〈변성(變成)〉, 궁극적인 변화의 단계를 변용(變容)〉의 단계라고 한번 불러 봅니다.

변형의 단계는 물리적인 변화의 단계를 말합니다. 단순한 정보의 전달만을 의도하는 글이 바로 이 단계에 있겠는데, 외국의 글을 사전적 의미를 좇아 글로 번역해 내는 단계도 여기에 속하기 쉽겠습니다.

이런 글은, 번역자에 따라 다르기는 하지만 문학이라는 이름을 요구할 권리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사람도 가계부를, 형용사와 부사가 극도로 절제된 하드보일드 문학의 극치라고는 부르지 않습니다.

변성의 단계는 화학적, 연금술적 변화의 단계를 말합니다. 글을 통하여 정보나 주장이 물리적인 변화 이상의 어떤 변화를 일으키기는 합니다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과 합류해서 사람의 것으로 육화(肉化)되는 데는 실패하고 마는 어떤 단계인 것이지요.

나는, 특정한 시대에만 유효해 보이는, 지독하게 강한 주장이 담긴 글을 읽을 때마다 그런 글들이 〈변성의 단계〉에 머물고 있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고는 합니다. 어떤 이데올로기와 함께 한 시대를 풍미하다가 특정한 시기에 폐기의 운명을 겪게 되는 글이 있다면 바로 이런 글에 속하지 않을까 싶군요.

울림이 있기는 하되 되울림을 지어내지 못하는 글을 나는 이 범주에다 둡니다. 이런 글이 요구해서 획득한 문학이라는 이름은 대체로 단명(短命)하기 마련이지요.

변용의 단계에는 글의 울림이 무엇으로 바뀌기는 바뀌되, 물리적으로도 화학적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어떤 것, 말하자면 초물질적인 되울림을 지어내는 단계를 말합니다.

술이 그것을 마신 사람의 내부에다 야기시키는 어떤 상태, 이것이 변용의 단계입니다. 술은 마신 사람에 따라 술주정이 되기도 하고 유쾌한 농담이 되기도 하지요. 때로는 사랑이 되기도 하고요.

그런데 변용의 단계에서는, 천변만화한 울림의 연쇄작용이 뒤따른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울림을 통하여 끊임없이 되울림의 사슬을 엮어내는 것이지요. 수천 년의 세월을 견디고도 여전히 유효해 보이는 종교 경전이, 좋은 시와 좋은 소설을 아우르는 언어의 예술이 바로 이런 변용의 진앙(震央) 노릇을 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고은 시인은, 끝난 뒤에 침묵을 지어내지 못하는 음악은 음악이 아니라 소음에 지나지 못한다······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음악이 침묵으로 변하는 이 지극한 역설적인 변화, 소리가 침묵을 지어내고 그 침묵이 다시 울림을 지어내는 이 반전(返轉)의 변증법이 바로 내가 말하는 변용인데요······

글쓸 때마다 해보는 생각, 글쓰기를 원하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곱씹게 되는 생각입니다.

이윤기가 건너는 강〉 중에서


아마추어가 쓴 감동적인 시(詩)를 읽었을 때, 프로가 쓴 감흥이 없는 시를 읽었을 때 나는 이윤기 선생의 이 에세이를 떠올립니다. 침묵을 지어내지 못하는 음악이 소음이라면 울림이 없는 시는 낙서가 아닐런지······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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