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위반 차의 견인, 견인업체 배불리는 창조경제?

주차단속

2017년의 봄은 필자에게 마법의 계절로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을 듯하다.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고, 필자주변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복잡한 심정을 페이스북을 통하여 보고 있었던지 생계문제로 타 지역에서 생활하던 오래된 지인이 밤을 틈타 필자를 위로방문을 하였다. 밤에 왔다가 새벽에 올라갔던 그 지인에게 이 글을 통하여 감사의 뜻을 전한다.

늦은 시간 만났던 필자와 지인은 어느 구석진 음식점에서 몇 가지 먹거리를 앞에 놓고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고는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며 주차해둔 곳으로 갔다. 그런데 차는 없고 그 자리에는 하얀 종이가 바닥에 붙어 있었다.

“견인이동통지서”

우리가 주차해둔 곳은 차량의 흐름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외진 곳이다. 더욱이 시간은 인적도 끊어진 늦은 밤.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닥에 노란실선이 그어져 있었다는 것. 즉, 현행 법률로 주차위반이 맞다.

그럼에도 필자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은, ‘현행 법률을 위반한 것이 사실이니 견인한 것이 타당한 조치’라는 것이 상식이라면, 그런 사고에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이다.

누구를 위한 법의 집행인가? “사회질서와 공공의 안녕” 어쩌고 하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이야기로는 필자의 생각을 이해시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듯하다. 대신 아이젠하워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다.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콜롬비아대학 총장으로 재직한 적이 있었다. 어느 날 그는, 학생들을 무더기로 징계하려는 결재서류를 접했다. 징계사유는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잔디밭을 학생들이 함부로 보행하여 망가뜨렸다는 것이었다.

아이젠하워는 잠시 결재를 미루고 실무자와 함께 현장답사에 나섰다. 현장에는 ‘출입금지’ 표지판이 선명했다. 그런데도 적지 않은 학생들이 표지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유유히 잔디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총장님, 총장님께서 보고 계시는데도 저 모양이 아닙니까? 마땅히 일벌백계로 다스려야 합니다.”

실무자는 힘주어 말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묵묵히 현장을 목격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아닐세, 어서 저 표지판을 치우고 그 자리에 길을 내어주게나. 학교는 학생들을 편안하게 해줘야 하지 않겠는가?”


아이젠하워와 대학 실무자 사이에는 극심한 견해차가 존재한다. 그렇지만 누구나 이 삽화에서 실무자가 ‘옳다’라고 말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법이란 것이 규제를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금지사항이나 남발하는 권위주의는 자칫 시대역행적인 오류를 범하기 쉽다.

차를 견인하는 것은 통행의 흐름을 원활하게 해서 공공에게 이익을 주자는 것인데,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에 세워둔 어느 가난한 가장의 소형차를 견인해 가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현행 주차단속 제도는 견인업체의 수익을 위한 제도일 뿐 공공의 이익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는 고급 외제차의 견인을 꺼리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필자가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고 그날 견인당한 차를 되찾기 위하여 차량보관소로 가던 중 택시기사가 전해준 이야기이다. 택시기사의 조카가 견인업체에서 일하는데 고급외제차는 견인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칫 실수하면 수리비가 엄청 나오기 때문이라나.

필자가 창조경제의 뜻을 잘 모르지만, 누군가는 세수와 견인업체의 수익증대가 창조경제의 일환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하지 싶다. 법은 도입취지가 중요하다.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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