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남용 되고 있는 적폐라는 말

그랑프리 세계 여자배구대회
그랑프리 세계 여자 배구 대회에서 우리나라 여자 대표팀이 난적 폴란드를 3:1고 물리치고 2그룹 선두로 올라섰다.

밤새 ‘그랑프리 세계 여자 배구 대회’에 참가 중인 우리 여자 배구선수들이 난적 폴란드를 제압하고 2그룹 선두로 올라섰다는 뉴스가 흐뭇하게 한다. 언제부터인가 프로야구 못지않게 여자배구에 관심이 많아졌다. 디츨레 미오.

비록 1그룹이 아닌 2그룹이지만 우승을 목표로 하고 있던 우리로선 2주차 마지막 경기인 폴란드와의 경기만 이기면 선두로 나가는 중요한 일전이었는데 이겨서 다행이다. 폴란드는 우리보다 랭킹은 낮지만 상대 전적에서 우리보다 나았기에 내심 걱정이 많았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를 2~3잔 마시며 뉴스를 읽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여자 배구팀 덕분에 기분 좋게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읽는데 오늘따라 ‘적폐’라는 단어가 유독 많이 보인다. “무슨 적폐가 이리도 많아?” 좋았던 기분이 싸늘하게 가라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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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구장
적폐세력으로 몰린 KBO 한국야구위원회. (사진은 본 기사와 관련없음)

개중에는 적폐라는 단어가 옳게 쓰인 경우도 있지만, 그냥 ‘잘못’이나 ‘폐단’ 혹은 ‘불법’ 정도가 어울리는 곳에도 ‘적폐’라는 단어를 가져다 붙인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동안 없었던 적폐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느낌이다.

적폐란 ‘오랫동안 쌓이고 쌓인 폐단’이란 말이다. 그런데 예전 정권에서는 그리 자주 등장하던 단어가 아니었는데 이렇게 한꺼번에 나오다니 그사이 적폐의 용법이 바뀌었는지 온 사방이 적폐투성이다.

그동안 정부에서 ‘금지어’로 사용을 못하게 하였던지, 아니면 유행 좋아하는 국민들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적폐청산’이라는 한마디에 우루루~~ 따라하는 것이던지 둘 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내가 빠리에 올 즈음에 서울에서는 달달 볶은 머리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실제 빠리에서는 그와같은 머리모양을 찾아보기 힘들었었다. 그런 때에 지사원들의 부인 여럿이 한꺼번에 오를리 공항에 내렸는데,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달달 볶은 머리를 하고 있어, 마중 나간 남편들이 민망한 얼굴로 서로 쳐다본 적이 있었다.」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 운전사’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유행에 얼마나 민감한지 보여주는 이야기라 소개했다. 이처럼 우리의 몰개성에 대한 사례를 주변에서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는데 지금 유행하는 ‘적폐’의 출처가 정치권이므로 그쪽에서 한번 찾아봤다.

나이가 든 사람은 기억하겠지만 한때 ‘보수’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그래서 웬만한 정치인들은 서로 자신들이 보수주의자라고 방송이나 언론에 대고 떠들고 다녔다. 3김 시대 초기로 기억하는데 그때는 보수가 아니면 정치하기 힘들었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지만 그때는 보수가 워낙 인기 있었던 탓에 유신이라는 말도 용서되는 시절이었다. JP가 했던 말 “나는 유신본당이다”라는 말은 아주 유명한 말이다. 보수는 따뜻하고 좋은 것으로 인식되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다 보수가 가고 민주라는 말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민주주의 그 얼마나 가슴 떨리게 좋은 말인가. 온 사방천지가 민주였다. 민주가 들어가지 않으면 뭔가 어색할 지경이었다. 단체를 만들어도 민주를 넣었고, 연설을 해도 민주를 사용했다. 심지어 딸내미 이름이 민주인 친구가 셋이나 있다. 이민주, 최민주, 박민주.

아마 유세 정치에서 방송이나 인터넷을 이용한 미디어 정치가 가능해진 이즈음해서 프레임정치가 시작된 듯하다. 원하는 틀을 미리 짜놓고 사람을 나누는 못된 정치가 프레임 정치다. 이쪽 아니면 저쪽으로.

다양성은 개나발이다. 아마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때부터 빠리에 막 도착한 뽀글뽀글한 머리의 한국지사원 부인들처럼 유행을 쫓기 시작한 정치인이 등장했던 것 같다. 인기 찾아 삼만 리도 아니고 스스로 값어치를 높일 생각은 하지 않고 인기에 연연하는 방송용 정치인들.

맛있는 음식도 한두 끼다. 배고프면 꽁보리밥도 팔진미로 변하는 마당에 아무리 맛있다고 한들 계속 주면 물려서 못 먹는다. 그런 간단한 이치도 모르고 뭔가 통한다 싶으면 이건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고 막 쑤셔댄다.

지금처럼 적폐를 남용했다가 사람들이 적폐에 둔감해질까 걱정이다. 적폐라는 말이 나오면 파르르 떠는 것이 정상이어야 한다. 그런데 적폐가 아닌 것에도 무슨 딱지 붙이듯이 적폐로 몰면 내성이 생겨 적폐를 보고도 둔감해지기 마련이다. 덮어놓고 적폐 세력으로 모는 것은 분명 문제 있다. 지금의 세태는 인민군이 반동세력을 잡아들이는 것과 별반 차이 없어 보인다.

적폐는 쌓이고 쌓인 잘못을 뜻하지 몇 번 되풀이된 것 가지고 적폐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적폐의 오남용이다. ‘쌓이고’라는 말은 여러 번 되풀이되었다는 말인데 그것이 또 쌓였으니 얼마나 많이 잘못해야 적폐가 되겠는가.

다시 말하지만 듣기 좋은 말도 한두 번이다. 보수가 그랬고 민주가 그랬다. 촛불이 그러했고 태극기가 그러하다. 이데올로기를 꼭 보수와 민주로만 나누는 것도 우습거니와 촛불을 들면 민주세력이라는 것도 우습고, 태극기를 들어야만 애국시민이라는 것도 우습다.

지겨우면 안 되는 줄 알지만, 나는 민주라는 말이 지겹다. 촛불도 지겹고 태극기도 지겹다. 이런 것을 전문용어로 ‘피로도’라고 하던데, 우리나라 정치 우리나라 언론 정말 피곤하다.

정치권에서 ‘적폐청산’이라고 한마디 하니까 소위 글을 다루는 언론에서 정확한 용법도 무시하고 적폐라는 단어를 무시로 사용하는 것을 보니 한숨만 나온다. 예전엔 적폐가 없어서 사용 안 했나?

마크 트웨인이 말했다.
“설교가 20분을 넘으면 죄인도 구원받기를 포기한다.”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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