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복 입은 농부와 사진가

포천 명성산
포천 명성산 ©백문숙

가을이 익어간다. 오늘은 밤새 내린 눈이 겨울이 당도했음을 알려준다. 돌아가는 판세가 올해도 단풍구경은 글렀지 싶다. 하긴 봄에 꽃구경도 못했는데 가을이라고 단풍구경이 웬 말인가. 그래도 책상 앞에 앉아 사진으로나마 꽃구경 단풍구경 할 수 있으니 다행이다.

나의 또 다른 세상 페이스북에는 친구들이 올려둔 이야기들과 사진들이 가득하다. 밤새 내린 눈 사진이나 여행 중 찍었다는 사진들이 그에 얽힌 이야기들과 함께 게시되어 있는데 제법 볼만하다.

친구들이 페이스북에 올려둔 게시물에 바쁠 땐 빚을 갚는 심정으로 공감표시를 하기도 하지만 가급적이면 올려놓은 게시물을 꼼꼼히 읽어보는 편이다. 한꺼번에 사진을 많이 등록했을 땐 좀 난감한데 그래도 사진 한 장 한 장 유심히 살펴보려 애를 쓴다.

유난히 산을 좋아하는 친구가 있다. 그를 보면 내가 얼마나 게으름뱅이인지 반성심이 저절로 든다. 그는 최근 장거리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몸이 피곤할 법도 하건만 그사이 또 산에 갔었나보다. 지난 주말 등산했다며 사진을 몇 장 올려놨다.

포천 명성산의 풍경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게시된 사진을 감상하다보니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아름다운 풍경인데 뭐지? 불편함의 이유는 금방 파악이 된다. 산에 편하게 다니라고 설치한 인공물이다.

포천 명성산
포천 명성산 ©백문숙

어느 유명 사진가가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하여 이곳저곳으로 여행을 하다가 어느 시골마을에서 며칠 묵게 되었다. 하루는 이 사진가가 이른 저녁을 먹고 마을 산책을 나섰다가 소를 몰고 가는 농부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이 모습은 황혼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을 자아냈는데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었다.

하지만 사진가는 그 멋진 장면을 찍지 못했다. 가볍게 나섰던 산책길이라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장면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사진가는 농부에게 내일도 꼭 이 시간에 이곳을 지나가 주면 좋겠다고 부탁했다. 물론 농부는 매일 그 시간에 일을 마칠 뿐만 아니라 집으로 가는 길도 그 길 뿐이므로 흔쾌히 승낙했다.

다음날 사진가는 어제 그 장소로 나가서 농부를 기다렸다. 이윽고 어제 그 시간쯤 되자 워낭소리와 함께 멀리서 농부가 소를 몰고 왔다. 해는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평선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어제와 똑 같다. 사진가 얼른 카메라를 들이대고 이리저리 초점을 맞추는데 렌즈에 잡힌 농부의 모습이 이상했다. 농부가 양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의 유명 사진작가가 자신을 모델로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깨끗하게 씻고 양복을 빼입고 나온 것이다. 양복 입은 농부를 보는 사진가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편하게 산을 즐기라고 설치해둔 각종 인공물을 보는 나의 심정이 사진가와 같았다.

한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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