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계역을 추억하며

기차역

오늘도 화물열차는 어김없이 열두시 삼십분에 도착 하였다. 나는 철구르마를 옆에 놓고 냉장고며 TV를 화물열차에서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가져온 화물을 열차에 실었다. 내 옆에서 깃발을 든 기차승무원이 깃발을 위아래로 흔들고 있다. 열차는 그 깃발의 의미를 눈치 채고 언제 왔었냐는 듯이 꼬리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항상 일본영화의 철도원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의 기억 속에 여운을 남긴다. 그 역무원은 이 기찻길에 아내와 딸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앞둔 어느 날 그들의 손을 잡고 세상과 이별하는 장면이었다고 내 나름대로 기억한다.

오늘도 화물열차는 역무원의 깃발에 따라 천천히 굉음과 함께 떠나고, 그 역무원은 나에게 미소를 보내며 “수고하게”란 말을 하곤 역무실로 들어간다. 이곳은 대전에서 그리 멀지않은 두계역이다. 지금은 계룡역으로 이름도 바뀌고 역사도 새롭게 단장하였지만 그 보이지 않는 속에 나의 자취가 남아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철도 수화물에 온 것은 이삿짐센터에서 일을 할 때 알게 된 수화물 직원이 소개해줘서이다. 쉬는 시간이 많고 일도 그리 힘들지 않다기에 선뜻 시작할 수 있었다. 젊은 시절 무서움 없이 달려들다가 몸이 성치 않아 매번 좋은 기회가 와도 놓쳤던 터라 이번엔 그저 시간 때우며 체력단련의 기회로 삼기로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이곳에 와서 기차도 기차지만 역무원과 선로반 사람들의 일을 보고 나도 한자리 얻을 요량으로 그들에게 나름대로 힘도 써보았지만 공채로만 직원을 뽑는 터라 무산되고, 인생의 선로를 잘못 잡아 마음고생 몸 고생하는 나에게 그들이 친동생이나 아들에게 하듯이 용기를 주는 말들을 많이 해주었는데 나는 그것에 큰 위안을 얻었다.

선로반은 철길 보수작업을 한다. 육체적으로야 힘이 들지만 안정된 생활이 가능해 나는 빛 좋은 개살구 같은 정신노동자들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내는 아이들이 공부를 많이 하여 뒤에 점잖은 직업에 종사하기를 바랐는데 육체노동을 선호하는 나와는 교육관이 달라 아내와 갈등이 많았다.

나는 육체가 강건하면 그만큼 현실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 한다는 것을 이런 저런 일을 통하여 경험하였다. 따라서 교양은 교과서에서 배우는 정도면 충분하고 현실에서는 실무의 숙달과 함께 육체만 강건하다면 큰 성공은 못하더라도 무난한 삶은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었다.

크게 욕심 부리지 않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자 하는 나의 소박한 희망이 아내에게는 꿈도 이상도 없는 한 무기력한 남자의 자기 합리화로 비쳐졌을 것이고, 이는 우리가 떨어져 살게 되는 이유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런 내가 육체의 나약함을 느끼고는 언제나 신체를 강하게 단련할 수 있는 직업만 골라 선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신체라는 것이 힘든 일을 한다고 금방 강해지는 것이 아니어서 밤이면 지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 철도 수화물을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내가 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을 수행 중인 것을 아는 사람들은 별 말이 없었으나 그런 내막을 모르는 아내는 불만이 많았을 것이다.

기차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난다. 나는 고약한 냄새를 맡으며 기차가 플랫폼을 빠져나갈 때의 무서움과 철길 따라 걷다보면 불쑥 다가오는 불안 속에서 철길의 버팀목을 들고 운동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차는 꼭 종착역까지 달려야하고 나 역시 인생의 종착역까지 갈 수만 있다면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곳에는 유난히 사마귀가 많은 곳이었다. 그 자그마한 사마귀마저도 나에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나는 두려움을 없애려면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아침저녁으로 틈만 나면 철길 버팀목으로 나를 단련시켰다. 나의 기억속의 철도역은 일본영화 속의 철도역과 같은 모양이었고 그곳은 내가 몸과 마음을 단련시키던 수련장이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 그 옛날의 감성적인 모습은 비록 사라졌지만 지금도 나는 철길이나 철도역을 보면 선로를 따라 걷던 선로반 사람들과 깃발을 위 아래로 흔들면서 기차에게 신호를 보내던 역무원과 깃발의 움직임에 맞추어 굉음과 함께 뒷모습을 감추던 열차가 생각난다.

그리고 아무리 신체단련이 목적이었다고 하지만 매캐한 냄새가 나는 철길 버팀목이 나의 운동도구였음을 생각하면 그저 쓴 웃음과 함께 구수한 숭늉 한사발을 들이킨 듯한 느낌이 든다.

김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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