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자 작가 포토에세이(8) 겸손하라 가르쳐 준 천사의 나팔꽃

천사의 나팔꽃
《천사의 나팔꽃》 이름처럼 꽃모양이 정말 나팔을 닮았다. ⓒ김인자

이 꽃은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름을 가진 꽃이예요. 우리 아파트 화단에 핀 꽃이죠. 이렇게 노란 꽃이 나오기 전에는 이 넙적한 타원모양의 잎들 속에 오이 같기도 하고 가지 같기도 한 자루모양의 열매가 땅을 쳐다보며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자루모양의 열매 속에서 나팔처럼 생긴 노란 꽃이 팝콘 터지듯이 팡팡 튀어나왔어요. 마술사가 모자 밑에서 뭔가를 쓰윽 꺼내면 팍하고 펼쳐지던 꽃처럼요. 천사의 나팔이라는 이름이 예뻐서 화단 안으로 들어가 자세히 살펴보았어요. 가까이 가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생긴 모양이 정말 작은 나팔을 닮았네요.

‘천사의 나팔꽃’

꽃 이름이 너무 예쁘지요? 천사의 나팔에서는 어떤 소리가 날까요? 하늘나라 천사의 나팔은 정말 저렇게 생겼을까요? 그리고 천사는 나팔을 잘 불까요? 천사의 나팔꽃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기 시작했어요.

스르르~
천사의 나팔꽃 속에서 가느다란 꽃 실 하나가 내려왔어요.

어, 저 줄은 무슨 줄이지?

학교종이 땡땡땡
할 때의 학교종치는 줄인가?
땡땡 줄이 여기 와 있으면 학교 종은 어떻게 치지?
아이들은 모였을까?
학교종이 땡땡땡 하고 종을 못 쳐서 안 모였을까?

줄을 살살 잡아당겨볼까?
저 줄은 길까?
아님 짧을까?

줄을 잡아당기면 얼마나 더 내려올까?
저 줄의 끝은 어디일까?

이번엔 폴짝 뛰어 올라 줄을 잡아볼까?
혹시 이 줄은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무서운 호랑이를 피해서 타고 올라갔던 하늘에서 내려준 생명줄이 아닐까?

아니면 재크와 콩나무의 잭이 하늘나라 거인의 성에 갈 때 타고 올라간 콩나무일지도 몰라. 나도 저 줄을 타고 위로 위로 쭉쭉 올라가면 하늘나라 거인의 성에 갈 수 있을까?

어쩌면 긴머리소녀 라푼젤이 저 줄을 타고 내려올지도 몰라. 라푼젤의 머리는 얼마나 길까? 혹시 엄지공주가 저 줄을 타고 올라가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나는 두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한참을 쳐다봤어요.

천사의 나팔꽃 속에서 내려온 줄을 보고 있으니 잠깐 동안에도 어릴 적 읽었던 동화 속 주인공들이 줄줄이 엮어지는군요.

자, 그러면 이번엔 저 줄을 한번 살짝 잡아 당겨볼까? 어떤 일이 생길까? 이왕이면 나팔꽃 속에서 초코렛 맛이 나는 까만 꽃씨가 와르르 쏟아져 나왔으면 좋겠다.

아니면 이렇게 더운 날 저 줄을 잡아당기면 우물에서 퍼올린 아주 시원한 물이 쫘아악쫙 쏟아져 나올지도 모르겠다.

천사의 나팔꽃에 매달린 줄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초등학교 때 가을운동회가 생각이 난다. 그중에서도 ‘박 터트리기’

가을 운동회에서 오후 경기의 하이라이트는 청군 백군 이어달리기였고 오전 경기의 백미는 청군백군 대항 박 터트리기였다. 점심시간 전에 오전 경기를 마무리할 때 했던 박 터트리기.

청군과 백군이 긴 장대위에 매달아 놓은 흰색박과 파란색 박을 오재미를 던져 누가 먼저 터트리나 하는 경기였는데 오재미를 던져 박을 맞추는 아이도 더러 있었지만 대부분의 아이들은 손힘이 없어서 박이 있는데 까지 오재미를 던지질 못하고 자기 머리 위에서 그냥 떨어뜨리기 일쑤였다.

높이 매달아 놓은 박을 작은 손으로 던져서 터트린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하늘을 향해 오재미를 던졌다. 신나게 열심히 오재미를 던지다보면 어느 순간 둥근 박이 탁 하고 터지고 그 박속에서는 사탕이며 과자가 와르르 떨어졌다.

그리고 〈축 양곡초등학교 가을 운동회〉라는 검정글씨가 쓰여진 광목천이 박속에서 툭하고 떨어져 공중에서 확 펼쳐졌다.

저 가느다란 꽃실을 자꾸자꾸 잡아당기고 싶다. 잡아당기면 당길 때마다 어린시절 가을운동회 축하메시지처럼 나를 축하해줄 특별 메시지가 툭하고 떨어질 것만 같다.

저 꽃실을 잡아당기면 어린 시절 즐거웠던 또 다른 추억들이 금방이라도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만 같다.

어린 시절 나의 즐거운 추억을 소환시켜준 천사의 나팔꽃. 그 속에서 나온 작은 줄 하나. 저 줄의 끝이 어딘지 나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천사의 나팔 속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나는 화단 안으로 폴짝 뛰어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서 꽃줄을 한참을 들여다봤다. 그러다 줄이 나온 꽃씨 속이 궁금해서 땅에 얼굴을 대고 고개만 들어 꽃씨 속을 들여다봤다. 그런데 잘 보이지 않았다.

천사의 나팔꽃은 키가 나보다 훨씬 작다. 그래서 내가 천사의 나팔꽃을 보려면 나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서는 안 되고 겸손하게 숙여야한다. 거기다 꽃의 겉모양이 아니라 속을 보려면 똑바로 서서 고개만 숙여서도 안 되고 땅에 무릎을 꿇어야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천사의 나팔은 절대 자기 속을 보여주지 않았다. 좀 더 겸손하게 자신을 더 낮춰야했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땅에 닿을 만큼 바짝 숙이고 올려다봐야만 비로소 자기 속을 보여주는 천사의 나팔꽃.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면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최대한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함을 가르쳐 주는 천사의 나팔꽃이다.

“김 선생님, 거기서 뭐 하세요?”
부르는 소리에 뒤돌아보니 경비반장 할아버지다.
“반장님, 이거 봐요. 신기하죠. 실이 꽃 속에서 내려왔어요.”
“아, 김 선생님 어제 못 보셨구나. 머리 긴 소녀가 그 줄 타고 내려와서 419동으로 들어가던데~”
“아유, 반장님 센스쟁이.”
“얘는 겨우살이가 아닌가 봐여.”
“아, 그래요?”
“예, 겨울엔 화분에 옮겨 심어서 지하주차장에 갖다 놓지요. 안 그러면 모두 얼어 죽으니까”

유년시절 나의 행복했던 추억을 소환시켜준 천사의 나팔 이것은 경비반장 할아버지의 따뜻한 수고로움 덕분이었다.

천사의 나팔덕분에 나는 내 어린 시절 행복했던 추억의 함성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소리가 꼭 귀로만 들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던 귀한 시간.

소리 없는 즐거운 아우성. 내 유년시절의 행복한 함성을 천사의 나팔덕분에 들을 수 있었던 것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행복했던 시간의 소리를 들려줄 나팔을 찾아보세요. 이 좋은 계절이 다 가기 전에.

*****

들리나요?
주위를 잘 살펴보세요. 그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낮은 자세로 들어보세요. 누군가의 따뜻한 수고로움 덕분에 귀로는 잘 들리지 않던 소리가 마음의 소리로 들으면 아주 크게 잘 들을 수 있을 테니까요.

김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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